개인적인 비/이혜미

2020. 5. 13. 11:08*/poetry

 

 

 

각자의 지붕 아래에서 맞닿았지. 품속의 작은 단도들

이 차르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 세계의 그림자를 짚

어내며 빛을 빚는 비. 묽은 촛불들을 곳곳에 사르며 사

라지는 비.

비는 옮아가는 질병인가. 휘몰아치는 눈썹들인가. 갈

피를 놓친 낱장들인가. 검은 반지를 깨트리고 빠져나오

는 반투명의 손가락들. 오늘은 약속을 팽개친 손들

이 아주 많아.

겹쳐지며 각자를 밀어내는 지붕 밑에서. 우산마다 소

분(小分)하여 보관하던 하루치의 강수량을 꺼내 펼치

그곳은 나의 영토이지 너의 시간이 아니야. 너의 다

정, 너의 귀가, 너의 얼룩진 셔츠 소매 사이로 흘러나오

는 희고 무른 손가락들.

우리는 아름답게 걷는다. 근사하지만 하나는 아니

야. 우산이 언제나 피보다 느리듯 생각은 늘 피보다 느

리고.

근사하다는 건 가깝다는 것. 나는 하얗고 너는 희

다. 나는 혼자이고 너는 하나뿐이다. 비슷하지만 같

은 건 아니야. 우리는 서로의 지붕에 지붕을 보태며 지

속되는 빗속을 조금쯤 가깝게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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