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26. 20:22ㆍ*/scrap
나는 비교적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내가 유년기를 보낸 1980년대에는 규칙적인 생활이 전 국가적 미덕으로 장려되었는데, 21세기가 된 지금도 나는 시대의 화석처럼 규칙적으로 살아가려 노력한다.
매일 아침 여섯 시경에 일어난다. 날씨에 따라 산책을 나갈 수도 있고, 곧장 컴퓨터 앞에 앉을 수도 있다. 밤잠이 많은 타입이라 아침에 일할 때 가장 능률이 좋다. 그래서 아침에는 머리를 가장 많이 써야 하는 일, 그러니까 글 쓰는 일을 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말을 제외하고는 거르지 않는다.
‘글은 실컷 놀다가 마음이 내킬 때, 영감이 떠오를 때 밤이고 낮이고 상관없이 쓰는 것’이라는 말은 둔재인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반드시 글을 써야만 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영감은 쓰는 도중에 온다. 물론 걷다가, TV를 보다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다가, 여행을 하다가 영감이 떠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영감은 아무것도 아니다. 가까이 가면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것. 영감이 완전한 모양을 갖춘 하나의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귀찮고 힘들고 짜증스러운 노동이 필요하다. 나는 프리랜서로 일하며 살고 있다. 소속된 곳도, 정해진 업무 시간도, 동료도 없다. 월급도, 회식도, 인사 고과도, 격려도, 칭찬도, 비난도, 책임 추궁도 없다.
혼자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며 일을 하고 있으면 우주의 미아라도 된 기분이다. 가끔 TV 드라마에서 직장인들이 곱창을 안주 삼아 소주를 기울이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그 자리에 끼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일에 대한 스트레스라든지, 앞날에 대한 불안은 회사원보다는 나 같은 프리랜서에게 더 클지도 모른다.
나는 나 자신을 경영하고 나 자신을 꾸려나간다. 이놈이 말을 듣지 않으면 망한다. 그래서 나에게 규칙적인 일과를 부여한다. 매일 아침 이 시간에는 일어나야 해. 이 시간부터 이 시간까지는 무조건 앉아서 글을 쓰고, 그다음에는 다른 일을 하고, 또 그다음에는 이 일. 아무튼 저녁이 되어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오늘 해야 할 일을 다 끝마쳐야 하기에 마음이 바쁘다.
체력이 떨어지면 머리도 멍해지기 때문에 산책이나 달리기처럼 몸을 쓰는 일도 일과에 꼭 끼워 넣는다. 나는 이렇게 성실한 공장장 같은 자세로 산다. 정해진 일과를 지키고 최대한 단순하고 건강하게 생활하려 노력하면서. 어른들 말로 하자면 부정을 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이유는 내가 원래 반듯한 인간이라서가 아니다. 실은 한 발만 잘못 디디면 어둠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질 소지가 다분한 인간이다. 그것을 20대의 몇 가지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그러니 20대에 해야 할 일이란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20대의 경험은 ‘오는 남자(여자) 막지 않고 가는 남자(여자) 잡지 않는다’는 식이면 적당하다. 20대에는 실패를 해도 회복 가능한 법이니까 무엇이든 해본다. 이상한 연애를 하는 것도, 남들이 다 뜯어말리는 일을 하는 것도 좋다. 특히 엄마가 하지 말라는 일을 해보는 것이 가장 좋다. 심지어 남을 따라 해보는 것도 괜찮다.
하다 보면 ‘이건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바로 나라는 인간의 개성이니까. 자아라는 건 결국 타인과의 차이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무도인이기도 한 우치다 타츠루는 청소란 ‘우주의 무질서에 대항해 나만의 질서를 세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매일 청소를 해도 매일 더러워진다. 그러면 청소하지 않아도 되잖아,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꿋꿋이 청소를 해야 하는 이유는 이 무질서한 우주에서 나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다. 삶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노력해도 안 되는 일들은 너무나 많다.
희망보다는 절망을 더 많이 경험하고, 원하는 삶과 실제 삶의 간극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가끔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우주는 기본적으로 무질서하며 나라는 미물에게 딱히 우호적이지도 않다.
우리가 그런 우주의 무질서에 대항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하는 것, 어떻게든 내가 가진 것을 활용해 살아가는 것, 나 자신의 작고 조용한 질서를 세워나가는 것, 그것뿐이다. 생활을 단순하고 건강하게 꾸려나가려는 노력 역시 그것의 일환이다.
강박증 환자처럼 규칙 자체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건강한 생활을 통해 이 우주의 무질서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깨끗하게 치운 방처럼 맑은 정신으로 일하며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다른 누군가가 그 일을 대신해줄 거라 믿은 적도 없다.
내가 비관적이고 소심한 사람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의 질서를 세우려 노력하는 우리들의 작은 우주가 모이고 모이면 어떨까. 그것 자체로 크고 썩 괜찮은 우주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늘 하고 있다.
[845호 – Think]
Writer 한수희 책 『온전히 나답게』,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저자
출처:
https://univ20.com/84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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