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락/심보선

2020. 12. 11. 20:27*/poetry




이제껏 도약을 꿈꿔 본 적 없다
다만 사각형의 문들이 나를
공허에서 공허로
평면에서 평면으로 옮겼다
존재가 비존재를 향해
무인 비행선이 하늘에서 지그재그로 추락하듯
느리게 굴러 떨어지고 있다
나는 감정에 충실했고
나쁜 습관을 버렸고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어쩌면
키 크고 잘생긴 회계사가 될 수도 있었다
허나 어떤 악덕이 생을 여기까지 끌어내렸다
동요하는 눈동자와 망설이는 입술 때문인가
백 명의 친구와 열 명의 애인 때문인가
나는 모든 예감에 주의를 기울였고
폭설과 폭우는 되도록 피했고
언젠가는 좋든 나쁘든
결정적인 사건이 이어나리라 믿었다
허나 빌어먹을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고
애수에 빠져 흑백영화를 보다
오오, 저 찬란한 핑크, 핑크! 외쳐댈 뿐
스스로를 견딜 수 없다는 것만큼
견딜 수 없는 일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전락했고
이 순간에도 한없이 전락하고 있다
길 잃은 고양이들이 털을 곤두세우고 쏘다니는
호의가 아무렇지도 않게 흉조로 해석되는
이 복잡하고 냉혹한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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