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꿈/이현호

2019. 8. 24. 10:34*/poetry






삶을 이렇게 슬프게 만들 때 신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잭 케루악, 「길 위에서」에서



***



이유는 묻지 않을 것이다
각자에게는 각각의 슬픔이 있다
볕이 들지 않는 반지하 방에서
밤새 손가락 한 마디쯤 자라 있는
식물의 기묘함 같은 것

유독 눈을 끔벅이지 않고 우는
네 얼굴은 어느 슬픔의 사투리일까
내게는 겨울이면 동쪽 바다를 찾는
내 것만의 비통이 있고
우리에겐 서로의 짭조름한 입술을 훔치던
그 여름밤의 기도가 있다

너를 슬쩍 알아챈 적도 있었다, 새점(占)을 보듯이
신은 엄마의 치맛자락을 놓지 않는 어린애처럼 인간을 붙들고 있다고 믿은 때가 있고
네가 내게 짓는 말은 신이 사람의 입을 빌려 하는 말이라고 믿었던 적도 있지만

묻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우리에게는 발목을 묻고 사는 각자의 습지와
저마다의 귓속에서 곤잠을 자는
신의 옹알이가 있어
왜 그러느냐고 이유도 없이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손이
곁을 더듬대는 꿈을 번갈아 자주 꾸었을 뿐
똑바로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속으로만 물을 삼키는 관엽식물의 기묘한 표정을 알아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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