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둥 마는 둥/삼십대/심보선
2018. 5. 9. 10:00ㆍ*/poetry
나 다 자랐다, 청춘은 껌처럼 씹고 버렸다,
가끔 눈물이 흘렀으나 그것을 기적이라 믿지 않았다,
다만 깜짝 놀라 친구들에게 전화질이나 해댈 뿐,
뭐하고 사니, 산책은 나의 종교, 하품은 나의 기도문,
귀의할 곳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
공원에 나가 사진도 찍고 김밥도 먹었다,
평화로웠으나, 삼십대,
평화가 그리 믿을 만한 것이겠나,
비행운에 할퀴운 하늘이 순식간에 아무는 것을
잔디밭에 누워 바라보았다,
내 속 어딘가에 고여있는 하얀 피,
꿈속에, 니가 나타났다,
다음 날 꿈에도, 같은 자리에 니가 서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너랑 닮은 새였다(제발 날아가지 마),
삼십대, 다 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산책에서 돌아오면 이 텅 빈 방,
누군가 잠시 들러 침을 뱉고 떠나도,
한 계절 따뜻하리,
음악을 고르고, 차를 끓이고,
책장을 넘기고, 화분에 물을 주고,
이것을 아늑한 휴일이라 부른다면,
뭐, 그렇다 치자, 창밖, 가을비 내린다,
삼십대, 나 흐르는 빗물 오래오래 바라보며,
사는 둥, 마는 둥, 살아간다
삼십대/심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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