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주의] 에피쿠로스 학파와 쾌락주의

2022. 8. 14. 12:59*/scrap

쾌락주의(Hedonism)

쾌락주의(Hedonism)는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며 최고의 선이라 하여,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을 도덕원리로 삼는 윤리설이다.

쾌락을 육체적인 것으로 보는가, 정신적인 것으로 보는가, 또는 자기만의 쾌락으로 하는가, 많은 사람의 쾌락으로 하는가 등에 따라서 여러 가지 논의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쾌락주의라고 할 경우, 상식으로서는 감각적, 육체적인 쾌락만을 목표로 하는 견해를 말하는 듯하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이름에 유래하여 쾌락주의를 에피큐리어니즘, 그리고 쾌락주의자를 에피큐리언이라고도 한다.

심리학적 쾌락주의(Psychological hedonism) 혹은 동기적 쾌락주의(motivational hedonism)는 무엇이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는지에 관한 실험적 이론이다. 이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쾌락(pleasure)을 증대하고 고통(pain)을 피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항상 에고이즘(egoism)과 함께 이해된다. 즉 사람은 오로지 자기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은 쾌락을 야기하는 것에 대한 신념에 의존한다. 잘못된 신념은 우리를 오도하고 우리 행동은 쾌락을 일으키지 못하지만, 심리학적 쾌락주의에 의하면 실패한 행동조차 쾌락을 고려한 것이 동기를 부여한 것이라고 본다. 쾌락주의의 모순(paradox of hedonism)은 쾌락 추구 행동은 따르는 다른 동기로부터 초래하는 것보다 실질적인 쾌락을 불러오는 것이 더 적다는 점에서 자멸적이라는 가설에 근거한다.

심리학적 쾌락주의는 인간 행동의 총체를 설명하는 직접적인 이론을 제공한다. 쾌락 추구 행동은 흔한 현상이며 때때로 인간 행동을 지배하기에, 심리학적 쾌락주의는 직관적 개연성(intuitive plausibliity)을 갖는다. 그러나 모든 행동을 심리학적 쾌락주의로 해석하는 일반화는 상당한 논쟁을 불러온다. 비판으로는 쾌락에 관한 개연적인 설명이 없는 행동을 반례로 제시한다. 예를 들어, 쾌락 이외의 다른 것들에 대한 이기적 동기(egoistic motive) (건강, 자기계발, 사후 명성)와 이타적 동기(altruistic motive) (자식들의 행복 기원, 큰 명분을 위한 인생의 희생)의 경우도 있다. 심리학적 쾌락주의는 이러한 행동들을 쾌락 추구 행동으로 재해석한다. 예를 들어 자식이 행복한 것을 보거나 죽음이 의미있을 것을 안다는 것이 목전의 쾌락을 희생하는 사람에게는 쾌락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상정한다.

또한 비판으로는 자기반성을 통하여, 쾌락 추구는 일부 다른 사람들의 동기력(motivating force)의 한 유형일 뿐, 쾌락/고통이라는 차원에서 모든 경우를 재해석하는 것은 이와 모순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도 한다. 또한 비판으로는 심리학적 쾌락주의의 기본적 주장인 무엇이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하는가는 철학이 아닌 심리학 영역이란 것이며, 따라서 이를 입증하거나 반대할 실험적 증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Epicurus)

에피쿠로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에피쿠로스 학파(Epicurianism)라 불리는 학파의 창시자이다. 에피쿠로스는 300여 권 저술 활동을 했는데, 그 가운데 몇 권만 전해진다. 알려진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 대부분은 훋 추종자나 해설자에서 유래한다. 에피쿠로스에게서 철학 목적은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얻는데 있었다. 그가 말하는 행복하고 평온한 삶은 평정, 평화, 공포로부터의 자유, 무통의 특징이 있다. 그는 쾌락과 고통은 무엇이 좋고 악한지에 대한 척도가 되고, 죽음은 몸과 영혼의 종말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신은 인간을 벌주거나 보상하지 않고, 우주는 무한하고 영원하며,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궁극적으로는 빈 공간을 움직이는 원자들의 움직임과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다고 가르쳤다.

 

에피쿠로스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는 규모는 작지만 매우 헌신적으로 그를 추종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여성을 예외가 아닌 정식으로 받아들인 첫 학파였다. 이 학파는 원래 에피쿠로스의 집과 정원에서 열렸다. 정원으로 통하는 문에 있는 조각은 세네카의 편지 중 하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방황하는 나그네들이여, 여기야말로 당신이 거처할 진정 좋은 곳이요. 여기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善) 즐거움이 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우정을 행복의 재료로 중요히 여겼고, 학교는 친구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라 종종 비유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계급을 매겼고, 그들이 그의 교의에 맹세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사상

그는 자연학에 있어서는 원자론적 유물론을, 윤리학에 있어서는 쾌락주의를 주장하여 쾌락주의 철학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쾌락은 방탕자의 환락이 아니라, 모든 정신적/육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특히 순간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했던 퀴레네 학파와는 달리, 지속적이고 정적인 쾌락을 추구했다. '아타락시아(ataraxia)'란 바로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안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널리 퍼져서 종교처럼 되고 큰 영향을 끼쳤다.

 

 

과학과 윤리 예건

에피쿠로스는 직접적인 관찰과 이론적 추론으로 시험된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과학과 과학적 방법 발전에서 중요한 인물이 된다. 그의 자연과 물리에 대한 많은 생각들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학적 개념들을 예견했다. 그는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의 중국, 인도, 이란, 근동, 고대 그리스에서 혁명적인 생각이 나오던 시대의 중요 인물이었다. 그의 상호관계에서의 윤리에 대한 주장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최초였으며 윤리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한 사람에게의 피해의 최소와 다른 사람에게의 최대의 행복을 강조함으로써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의 공식화와 구별되었다.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은 그와 동시대의 그리고 그 이전의 다른 그리스 철학자들과는 다른 사상이었으나, 데모크리토스의 사상이 가졌던 여러 원칙과 같은 원칙들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데모크리토스처럼 그 또한 세상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작은 조각(atoms)들이 빈 공간(khaos)을 떠다니는 거싱라고 빋은 원자론자(atomist)였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원자들이 아무런 계획이나 목적 없이 충돌하고 되튀며, 서로 부착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들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현대의 물질관과 비교해보라) 하지만 그는 그 입자들의 운동이 단순한 직선이 아니라 가끔 방향이 바뀐다고 말했다는 점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는 달랐다. 이것은 이전의 원자론에서는 필연적이었던 결정론을 피하고 세상에 자유 의지를 부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불확정성과 비교해보라)

그는 정기적으로 여성들과 노예들을 그의 학파에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인에게 근본적인 인간 평등사상을 소개했다. 또한 그는 당시에 흔하던 신을 두려워하고 신을 숭배하는 전통을 깨뜨린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종교적 활동을 신을 생각하여 그들을 하나의 행복한 삶의 예시로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했다. 에피쿠로스는 전통적인 그리스 종교 활동에 참여했으나 신에 대해 거지된 생각을 갖는 것은 잘못됐다고 가르쳤다. 그에 의하면, 신들은 불사의 존재이며 축복받은 존재이고, 이 이외에 그 어떤 부가적인 가치를 신에게 부과하는 것은 불경한 행위이다. 신은 우리가 흔히 믿는 것처럼 나쁜 자를 벌하고 착한 자를 상주지 않는다. 대중들은 신이 사악한 인간에게는 악을 주고, 신을 모델로 삼아 올바른 생활을 하는 인간들에게는 축복을 준다고 믿지만 에피쿠로스는 실제로 신들은 인간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믿었다. 불경한 자는 대중이 숭배하는 신을 부정하는 자가 아니라 신에 대해 대중이 믿는 대로 단언하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쾌락은 고통의 부재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모든 선하고 나쁜 것은 쾌락과 고통의 지각에서 오는 것이라고 했다. 좋은 것은 기쁜 것이고, 나쁜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쾌락과 고통은,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선함과 악함의 궁극적인 도덕적 기준이다. 만약 고통이 쾌락보다 더 큰데도 그것이 선택되었다면 그서이 결국에는 더 큰 쾌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가 무분별한 쾌락의 추구를 지지했다고 흔히 오해받지만, 그가 진실로 원했던 것은 고통의 부재-죽음의 공포와 신의 응보로부터 자유로운 만족감과 고요한 상태-였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고통으로 괴롭지 않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쾌락이 필요 없고, '완벽한 마음의 평화의 상태'(ataraxia)가 된다.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은 에피쿠로스파 의사였던 아스클레피아데와 비티니아에 의해 의학에 접목되었다. 그들은 그리스의 의약품을 처음으로 로마에 들여온 인물들 중 하나이다. 아스클레피아데는 친절하고 호의적이며 기분 좋고 고통 없는 치료 방법을 도입했다. 그는 정신 질환에 관해 인도적인 치료 방법을 지지했고, 정신이 나간 사람들을 가두지 않고 식이요법과 마사지 같은 자연적 치료법으로 치료하려 했다. 그의 가르침은 놀라우리만치 현대적이며, 따라서 마스클레피아데는 정신과치료, 물리치료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에피쿠로스는 지나침 방임에 대해 명료하게 경고했는데, 그것이 때때로 고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현대의 '숙취(hangover)'에 대해 말하는 듯한 그의 한 이론에서 에피쿠로스는 너무 열정적으로 사랑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그러한 사랑 대신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을 곁에 두는 것을 고요하고 평온한 삶을 지켜나가는 데에 더 도움이 된다고 했다.

에피쿠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반대로)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고 믿었다. 사람이 죽을 때, 그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죽음의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의 유명한 말 대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존재할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과 함께 모든 감각과 의식이 끝나기 때문에 죽음에는 쾌락도 고통도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생겨난다.

이와 같은 문맥에서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

Non fui, fui, non sum, non curo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존재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 문장은 에피쿠로스의 추종자들을 비롯한 많은 로마제국 시대의 비석에 새겨져 있다. 이 문구는 인문주의 장례식(humanist funeral)에 종종 사용된다.

에피쿠로스의 역설은 악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다. 이 역설은 '신은 전능하며 신은 선한데 악은 존재한다'는 삼도논법(3자 택일의 궁지)이며 그 내용은 자주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된다.

신은 악을 없애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전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능력도 있고 없애려 하기도 하는가? 그렇다면 악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능력도 없고 없애려 하지도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를 신이라 부르나?

이 주장은 고대 그리스의 회의론자들이 자주 사용하던 것과 비슷했으며, 로마 카톨릭회의 관점에서 에피쿠로스를 바라본 락탄티누스가 그를 무신론자로 평가하는데 잘못 사용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레이놀드에 의하면 변신론은 학문적 기원이 에피쿠로스가 아니며, 반-에피쿠로스 학파에 있을 것으로 본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삼도논법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회의론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기록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에피쿠로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신들이 우리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지도 모르며, 따라서 현생이나 내세에서 우리를 벌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에피쿠로스는 그의 인식론에서 이성을 강조했으며, 그의 '다수 설명의 원칙(the Principle of Mutiple Explanation)'(만약 여러 가지 이론이 관찰되는 데이터들과 일관된다면 그 모두를 유지하라)은 일찍이 과학철학에 기여했다.

스토아 학파와 대조적으로, 에피쿠로스 학파는 당시 정치 참여에 흥미를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정치 참여는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신 에피쿠로스는 은둔을 지지했다. 그의 이러한 원칙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비밀스럽게 살아라, 너 자신이 주목받게 하지 말고 삶을 살아라'. 즉, 부와 영광을 추구하며 살지 말고 음식, 친구들 같은 소소한 것들을 즐기면서 이름 없이 살라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도덕적 지침으로 개인의 피해 최소화와 행복의 극대화를 강조했다.

현명하고 바르게 잘 살지 않으면 행복한 삶을 살기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행복한 삶을 살지 않으면 현명하고 바르게 잘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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